새벽기도회 가야 하는데 이러고 있다. -_-;;;

 

요즘, OO 너랑 수익사업 이야기 외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전혀 없어서 이렇게 메일로 대신한다.

부족할지 모르고, '글' 이라는 매개체의 한계 때문에 납득되어지지 않고, 이해되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을 테지만, 모쪼록 내 수행이 부족한 결과라 그런 것이니 양해하고 봐 주길 바래.

 

일단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받는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면 죄의 근본부터 이야기 해야 돼.

죄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죄를 만드셨을까?

악을 만드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완전 선, 선 밖엔 없으신 완전 무결하신 분이신데?

만약,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악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면, 우리의 하나님은 인간과 다를 바 없어야 돼.

인간은 선과 악을 모두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시거든.

분명하고도 그 무엇보다도 명확하게!

그건 진리야.

그럼 대체 죄는 뭘까?

 

죄란 하나님께서 만드신 악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이 결핍된 상태를 이야기 해.

앞서 내가 하나님께서는 밖엔 없으신 완전 무결하신 분이라고 그랬지?

선 '밖엔' 없는데 완전 무결하셔.

선과 악의 근간이 어찌 되든 간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인간의 이해에서 봤을 때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선과 악이 동등하게 균형잡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선하심으로 완전하시다고 했다면 '완전' 이라는 말은 밖엔 없다는 말을 의미해.

곧 인간의 가치판단이 어떻든 '완전' 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완전하게 귀속되어 있는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거야.

 

여기서 죄의 근간이 나와.

우리가 생각하기에, 일반 철학과 인간이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창조주 시라면 악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거야.

하지만 그렇지 않아.

창세기 1:3 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셔.

이 빛은 1:14 에 나오는 빛 과는 다른 것으로, 3절의 빛은 생명, 사랑, 순수, 열정, 영광, 선, 성령님의 힘 등으로 대변되는 역동적인 하나님의 생명력을 의미하고, 14절의 빛은 태양 빛, 가시광선으로 불리는 일반적인 물리적 빛을 의미해.

그리고 잘 보면, 하나님께서는 빛 만을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있어.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 이 빛만을 창조하신 것엔 어둠이 포함되어 있지만, 어둠을 위해서 어둠 자체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빛의 결핍이 생기는 곳을 '어둠' 이라고 명하신 거야.

 

그럼 어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냐 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어둠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맞아.

이 역시도 진리야.

하지만 이는 빛에 따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빛의 결핍으로 발생하는 당연한 자연법칙이지.

대체 왜 라는 질문을 하면 답할 길이 없어.

하나님의 법칙이 그러니까.

빛이 있으면 그림자와 어둠이 생기도록 빛의 성질 자체를 그렇게 정하신 거야.

만약 어둠이 없었다면 우리는 빛의 존재를 알 수 없을 것이고, 하나님의 존재도 인식할 없을 거야.

사단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겠지.

그렇게 어둠의 역할은 빛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야.

 

어둠의 존재를 가장 먼저 인식하고 이용한 것이 바로 사단.

그는 천사였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빌미로 범죄하여 하나님을 배신하고 지옥으로 쫓겨나지.

장차 그가 영원한 형벌을 받을 감옥을 자신의 집으로 삼게 된 거야.

이 사단의 타락은 인간에 의한 이유가 커.

자신은 천사로 하나님의 영광을 받은 존재로, 인간 따위완 비교도 안 될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인간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죽을 것을 담담하게 인정하시고 받아들이셔.

이게 바로 창세전부터 우리에게 예정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의미해.

사단은 이 사랑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거야.

오만하고 교만하고 아집에 가득 찬 사단은 자신의 창조주이자 주인이신 분이 그깟 하찮은 인간에게 목숨을 포기할 정도로 깊은 사랑을 주는 것을 참지 못 했어.

엄청난 질투가 밀려왔지.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대적해.

그리고는 그가 형벌을 받을 장소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 치욕스러운 죄의 대가를 받게 돼.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해.

바로 이 질투에 먼 사단이 하나님의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한 거야.

아담과 하와를.

그리고는 유혹에 성공해 인간에게 원죄의 굴레를 씌우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만들어 버렸지.

이게 사단이 착각하는 첫 번째 승리야(두 번째로 승리라고 착각하는 사건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돌아가시게 만들었을 때).

이 승리의 착각으로 사단은 더 큰 형벌을 받게 되고, 인간 역시 형벌을 받아 땅으로 쫓겨나게 돼.

그리고 인간과 사단은 같은 공간, 즉 '공중'을 공유하며 살게 돼.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공중은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주신 권세야.

곧 우리는 빛의 결핍의 기본 존재인 사단의 권세 아래서 살게 것이지.

 

바로 이러한 빛의 결핍이 가져온 존재에 의해서 타락되고 쫓겨나 삶을 살게 된 존재가 인간이야.

그리고 바로 첫 번째 사단의 승리 착각이 인간의 첫 번째 고난이었어.

고난으로 인해 인간은 힘들고 괴로운 삶을 가지게 되었지만,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의 역사를 목격하고 하나님의 양자되는 권세를 얻을 수 있었지.

곧 빛과 어둠의 공존을 가장 처음 경험한 것이라 할 수 있어.

이후 인간은 끊임없이 이 빛과 어둠의 공존에서 살아가며 고뇌하게 돼.

 

바로 이것이 고난이야.

빛의 결핍, 인간의 죄로 인한 사단의 권세가 날 향해 부르짖으며 위협하는 것.

 

그렇담 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이 어둠의 권세를 그냥 두시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미 승리하셨으면서도.

앞서 빛의 성질이 빛과 어둠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지?

바로 그와 같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이 약하거나, 힘이 약하거나, 하나님께서 하실 없어서가 아니라 빛이 있기 위해서는 어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

사단의 권세가 살아 있는 이유,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바로 이에 있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빛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세우신 창세 이전의 사랑의 계획이 드러나기 때문이야(이게 바로 예정론의 핵심이기도 해).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허락하시는 것' 이라고 해야 옳아.

어둠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 어둠 자체를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듯, 빛의 결핍이 빚은 죄와 고난 역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빛을 잃은, 빛이 결핍된 존재에 의해서 타락하여 얻은 최악의 결과물이야.

이 최악의 결과물을 이겨낸 사람들의 기록이 바로 성경이고.

그들이 위대한 신앙인이라고 칭송 받는 것은, 이길 것을 알고 고난을 '주신'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길 것을 알고 고난 가운데에 '두신' 하나님의 오래 참음에 의함이야.

왜 오래 참음 이냐면, 목숨까지 내어놓아 주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존재인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고난 가운데서 도움을 주지 않고 끝까지 이겨내길 기다리시는 일컫는 거야.

마치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가 넘어져 울고 있는 지켜만 보며 다시 일어서길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과 같이.

고난을 통해 연단 받고 훈련 받아 물리적 영향력 안에 갇혀만 있어야 하는 필연적인 세상 가운데서 튼튼한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길 원하시기 때문에 고난을 피하거나 당치 않게 하실 능력이 능히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허락하시는' 것이지, 피할 수 없는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야.

 

그럼 대체 왜 이 빛의 결핍, 고난이라는 과정이 생기는 것일까?

단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늘 좋은 것, 좋은 상황, 좋은 가호하심만을 주시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권속이 될 텐데.

이는 인간의 죄 때문이야.

빛의 결핍된 첫 존재인 사단이 유혹했다고는 하지만, 그 유혹에 넘어간 것은 인간이야.

이것이 바로 죄야.

그리고 죄는 반드시 형벌을 가져오지.

그리고 그 형벌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물리세계 안에서 갇혀야만 한다는 걸 뜻 해.

일반적 물리적, 과학적 법칙 안에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거지.

힘써 일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라는 하나님의 지상 명령은 인간에게 권세를 주신 것과 동시에, 인간이 지구의 물리법칙에 한정되어 살아갈,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권능이 결핍된 존재가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해.

노동하지 않으면 먹지 못 하는, 인과관계에 갇혀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지.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는 일반 법칙은 통하지 않았을 거야.

그 모두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세계였으니까(흙으로 모든 생육과 사람을 지으심이 가능하고, 갈비뼈로 여자로 만드시는 것도 가능하며, 영생 나무와 선악과가 존재 가능한,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판타지 월드).

 

이렇게 인간은 노동하지 않으면, 노력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어.

끊임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야 하지.

과정에서 인간에게 '욕심' 이 생겨.

끊임없이 채울 수 없는 갈증.

화폐의 발생에 대해서 배울 때 초등학교 시절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이 인간의 욕심에 대해서야.

인간은 끊임없이 편안함과 풍족함을 추구하려는 성질이 있어서 문명의 발전을 가져왔고, 이 문명의 발전은 화폐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라고 하지.

바로 이 끊임없는 풍족함에 대한 갈망.

이 갈망이 욕심을 만들어내고, 이 욕심은 갈증을, 갈증은 고뇌를, 고뇌는 고난을 낳아.

 

어쩌면 '난 그런 고뇌 없는데, 재물에 대한 욕심도, 물욕도 없는데' 라고 할 수도 있어.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요즘 취업 때문에 고민이 많지?

그 와중에 교회에 충실하지 못 해서 하나님께 죄송하기도 했고.

이 역시도 고난이야.

취업을 위해서, 네 꿈의 갈망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신앙과의 양립은 힘들어.

그래서 고뇌가 발생하지.

그리고 고난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해.

바로 고난이 이와 같아.

자력에 의한 것이든, 타력-타인과 사단-에 의한 것이든 인간은 갈망과 갈증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 결핍된 존재에 의해서 죄악에 빠져 그 역시 결핍된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의 본성 때문이야.

곧 고난의 원인이 결핍에 의한 갈증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어.

 

그리고 우리가 이 고난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 이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이 해결책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 결핍을 없애주시기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시고, 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성령님이 아니라면 그 어떤 인간도 이 결핍, 즉 고난을 이길 수 없어.

해결하신 분이 그리스도시니 해결책을 그 분에게서 찾는 건 인지상정 아니겠어?

 

구약의 사람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었어.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만 했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어.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 때문에 물리적인 존재, 곧 육적인 존재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해'.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고난을 없애고 싶어하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장차 다시 오셔서 완전한 에덴의 복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실 거야.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백이라곤, 고난 조차도 우리의 죄 때문임을 고백하고, 그 고난 가운데 빛을 더 드러내길 원하시고 그러한 역량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에 감사를 올려 드리는 것 뿐.

 

개인적으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욥 외엔 인간의 역사상 하나님의 심판을 직접 받은 사람은 없다고 봐(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이시지만 하나님 이시기도 하니까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외엔 모두가 인간의 원죄로 인한 타력에 의한 고난이든, 개인의 욕망과 욕심로 자력에 의한 고난이든 모두가 인간에 의한 고난이야.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극복한 이들의 기록이 성경이고.

 

글이 너무나 길어져서 이걸 읽을까 싶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내가 배우고 깨달은 바는 이상이다.

내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은 우습지만, 내 말 어디에서도 김재기 목사님이나 이광재 목사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부분은 없다고 자신한다.

 

 

 

모쪼록, 내가 내 잘남을 위해서, 스스로의 신앙을 변명하거나 변호하기 위해서 장황한 말들로 내 스스로를 자식으로 뒤덮고, 현학적 표현들로 내 지식을 뽐내기 위해서 장문의 글이 쓴 것이 아님을 알아주면 좋겠다.

어째서인지, 하나님께서는 너와 이런 신앙의 고민들을 나눌 기회들을 여러 번 허락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명확한 대답을 못 하고 깨달은 바들을 제대로 전달도 못 해서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를 허비하는 듯 자괴감과 죄송스러움이 쌓여갔고, 너를 혼란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발언들이, 정말로 거짓말 하지 않고 늘 걸렸었어.

장황하고 길게 쓸 수 밖에 없는 것은 내 글 솜씨가 부족해서도 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자세하게, 부족함 없이 완벽하게 말해주고 싶어서였음을 알아줬음 좋겠다.

 

앞으로도 지금과 같이 힘있는 신앙,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사랑 변하지 않길 기도할게.

요즘 더 깊어지는 듯 한 너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과연 이 자매를 어떻게 쓰실까 너무나 궁금하고 기대된다' 라는 생각이 든다.

부디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시대와 세대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귀한 일꾼으로 삼아지길 기도할게.

사랑하고 축복한다.

샬롬.

항간에, 이 원문 끝에 이어 사티레브 라는 인물을 등장시키며 이야기를 무신론으로 끌고 가는 글들이 눈에 띄는데, 100% 조작문입니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기독교를 비난할 생각으로 지어서 써 넣은 것 입니다.

어떤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냐고 하신다면, 글을 직접 읽어보시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당최 이야기 앞 뒤가 맞지도 않고, 짝 틀린 양말을 신은듯한 불편한 느낌(내용 때문이 아니라 구성 때문에)이 잔뜩 듭니다.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부분도 억지스럽고, 무엇보다도 화자의 화법이 변화됩니다.

초반엔 정우성 주연이다가 중반엔 장동건으로 바꿔놓고선 똑같은 인물이야 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은.



Professor: You are a Christian, aren't you, son?

교수님 : 자네는 크리스천인가?

Student : Yes, sir.

학생: 네. 그렇습니다, 교수님

Prof: So you believe in God?

교수님: 자네는 하나님을 믿는단 말이지?

Student : Absolutely, sir.

학생: 당연합니다.

Prof: Is God good?

교수님: 하나님은 좋으신 분인가?

Student : Sure.

학생: 그렇습니다

Prof: Is God all-powerful?

교수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Student : Yes.

학생: 네

Prof: My brother died of cancer even though he prayed to God to heal him. Most of us would attempt to help others who are ill. But God didn't. How is this God good then? Hmm?

교수님: 내 동생은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암으로 죽었어. 우리들조차도 아픈 사람이 있으면 도움을 줘.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 그런데도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고? 응?

(Student is silent.)

(학생은 말이 없었다)

Prof: You can't answer, can you? Let's start again, young fella. Is God good?

교수님: 답을 못하는군, 그렇지? 다시 물어보지, 어린 학생. 하나님은 좋으신가?

Student :Yes.

학생: 네.

Prof: Is Satan good?

교수님: 사탄은 좋은가?

Student : No.

학생: 아니요

Prof: Where does Satan come from?

교수님: 사탄은 누구한테서부터 온 것인가?

Student : From...God...

학생:..하나님....으로 부터요.

Prof: That's right. Tell me son, is there evil in this world?

교수님: 맞았어, 그럼 또 물어보겠네. 이세상엔 악한 것들이 있는가?

Student : Yes.

학생: 네.

Prof: Evil is everywhere, isn't it? And God did make everything. Correct?

교수님: 악한 것들은 어디에나 있어, 그렇지?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내 말이 틀리나?

Student : Yes.

학생: 맞습니다

Prof: So who created evil?

교수님: 그래서, 누가 악한 것들을 만들었나?

(Student does not answer.)

(학생이 대답 하지 않는다.)

Prof: Is there sickness? Immorality? Hatred? Ugliness? All these terrible things exist in the world, don't they?

교수님: 병은? 부도덕함은? 증오는? 추한 것들은? 이 모든 소름 끼치는 것들은 세상에 존재한다네. 그렇지 않은가?

Student :Yes, sir.

학생: 그렇습니다, 교수님.

Prof: So, who created them?

교수님: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을 누가 만들었다고?

(Student has no answer.)

(학생은 대답이 없다.)

Prof: Science says you have 5 senses you use to identify and observe the world around you. Tell me, son...Have you ever seen God?

교수님: 과학은 우리에게 오감이 있어 우리 주변의 것들을 관찰할 수 있다고 말하네. 그럼 이제 대답해 보게, 너는 하나님을 본적이 있는가?

Student : No, sir.

학생: 없습니다.

Prof: Tell us if you have ever heard your God?

교수님: 그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은?

Student : No , sir.

학생: 없습니다.

Prof: Have you ever felt your God, tasted your God, smelt your God? Have you ever had any sensory perception of God for that matter?

교수님: 그럼 하나님은 만져보았는가? 맛을 보았는가? 냄새를 맡아 보았는가? 하나님을 한번이라도 감각으로 인식해 본적이 있는가?

Student : No, sir. I'm afraid I haven't.

학생: 없습니다, 교수님. 없어요.

Prof: Yet you still believe in Him?

교수님: 그래서, 자네는 아직도 그를 믿나?

Student : Yes.

학생: 네.

Prof: According to empirical, testable, demonstrable protocol, science says your GOD doesn't exist. What do you say to that, son?

교수님: 사람들의 경험으로, 실험해본 결과, 과학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네, 이것에 대해 할 말이 있는가?

Student : Nothing. I only have my faith.

학생: 없습니다. 믿음이 있을 뿐이죠.

Prof: Yes. Faith. And that is the problem science has.

교수님: 그래, 믿음. 그게 바로 과학이 맞서고 있는 문제지.

Student : Professor, is there such a thing as heat?

학생: 그럼 교수님, 이세상엔 열이라는 게 존재 합니까?

Prof: Yes.

교수님: 존재하지.

Student : And is there such a thing as cold?

학생: 그럼 냉기는요?

Prof: Yes.

교수님: 그것도 존재하지.

Student : No sir. There isn't.

학생: 아니요, 교수님.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The lecture theatre becomes very quiet with this turn of events.)

(강의를 듣던 모든 학생들이 조용해졌다.)

Student : Sir, you can have lots of heat, even more heat, superheat, mega heat, white heat, a little heat or no heat. But we don't have anything called cold. We can hit 458 degrees below zero which is no heat, but we can't go any further after that. There is no such thing as cold. Cold is only a word we use to describe the absence of heat. We cannot measure cold. Heat is energy. Cold is not the opposite of heat, sir, just the absence of it.

학생: 교수님, 세상에는 많은 열 들이 있습니다, 뜨거운 열, 과열, 마그마의 열, 백열, 아주 소량의 열, 또는 열이 없기도 하지요. 하지만 냉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0도 에서부터 458도까지 열을 낮춰서 열을 없게는 만들 수 있지만, 그 이하로는 불가능하지요. 그러므로 냉기, 추위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열이 없다는 것을 이런 단어들로 표현할 뿐이지요. 우리는 추위의 단위를 잴 수 없습니다. 열은 에너지이고, 냉기는 그의 반대말, 즉 열이 없다는 것이지요.

(There is pin-drop silence in the lecture theatre.)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강의실은 조용했다.)

Student : What about darkness, Professor? Is there such a thing as darkness?

학생: 그럼 어둠이라는 것은요 교수님? 어둠이라는 것은 있나요?

Prof: Yes. What is night if there isn't darkness?

교수님: 그럼. 어둠이 없다면 밤은 뭔가?

Student : You're wrong again, sir. Darkness is the absence of something. You can have low light, normal light, bright light, flashing light....But if you have no light constantly, you have nothing and it's called darkness, isn't it? In reality, darkness isn't. If it were you would be able to make darkness darker, wouldn't you?

학생: 교수님이 또 틀리셨네요. 어둠은 빛이 없는 것이죠. 아주 적은 양의 빛이 있을 수도 있고, 보통 빛, 눈부신 빛, 플래시의 빛은 있지만 빛이 없는 것을 우리가 어둠이라고 부를 뿐이지요, 그렇지 않나요? 만약의 어둠이란 게 존재한다면 교수님은 어둠을 더 어둡게 만들 있겠네요? 안 그런가요?

Prof: So what is the point you are making, young man?

교수님: 그래서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Student : Sir, my point is your philosophical premise is flawed.

학생: 교수님,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상, 이성으로 만들어진 전제라는 것은 흠이 있다는 것입니다.

Prof: Flawed? Can you explain how?

교수님: 흠? 설명해 보겠나?

Student : Sir, you are working on the premise of duality. You argue there is life and then there is death, a good God and a bad God. You are viewing the concept of God as something finite, something we can measure. Sir, science can't even explain a thought. It uses electricity and magnetism, but has never seen, much less fully understood either one. To view death as the opposite of life is to be ignorant of the fact that death cannot exist as a substantive thing. Death is not the opposite of life: just the absence of it. Now tell me, Professor. Do you teach your students that they evolved from a monkey?

학생: 교수님, 교수님께서는 이성의 이중성을 이용하시고 있는 겁니다. 교수님께서는 인생이 있고 죽음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좋으신 하나님과 악한 하나님이 있다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제한되어 있는 개념으로, 우리가 잴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려고 하시는 거지요. 교수님, 과학은 생각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과학은 전기와 자석의 힘을 사용하지만 그것들을 보지도, 완벽히 이해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죽음을 생명의 반대말로 사용하게 되면, 죽음은 생명이 없을 때 대신하는 것이 되지요. 하지만 죽음은 생명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생명이 없다는 걸 나타낼 뿐이지요. 자, 이제 말씀해 주세요 교수님, 교수님께서는 교수님의 학생들에게 너희는 원숭이로부터 진화된 것이다 라고 가르치십니까?

Prof: If you are referring to the natural evolutionary process, yes, of course, I do.

교수님: 네가 자연의 진화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라면, 그렇다, 난 그렇게 가르쳐.

Student : Have you ever observed evolution with your own eyes, sir?

학생: 그럼 교수님은 직접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하는 관찰해 보셨겠네요?

(The Professor shakes his head with a smile, beginning to realize where the argument is going.)

(교수님은 이 학생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채고 고개를 저으시며 미소 지으셨다)

Student : Since no one has ever observed the process of evolution at work and cannot even prove that this process is an on-going endeavour, are you not teaching your opinion, sir? Are you not a scientist but a preacher?

학생: 지금까지 아무도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하는 것을 직접 보고 관찰해보지 않았으니까 교수님은 그냥 우리에서 교수님의 의견을 가르치시는 거네요? 교수님을 과학자가 아니라 그냥 전도자네요?

(The class is in uproar.)

(교실이 시끌시끌 해지기 시작한다.)

Student : Is there anyone in the class who has ever seen the Professor's brain?

학생: 여기 있는 모든 학생들 중에 교수님의 뇌를 직접 본 사람이 있습니까?

(The class breaks out into laughter.)

(모든 학생들이 웃는다.)

Student : Is there anyone here who has ever heard the Professor's brain, felt it, touched or smelt it?.....No one appears to have done so. So, according to the established rules of empirical, stable, demonstrable protocol, science says that you have no brain, sir. With all due respect, sir, how do we then trust your lectures, sir? (The room is silent. The professor stares at the student, his face unfathomable.)

학생: 여기 있는 모든 사람 중에 교수님의 뇌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다든지, 만져 보았다든지, 냄새를 맡아본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는 같군요. 그럼 사람들의 경험으로, 실험결과에 의해서 과학은 교수님은 뇌가 없다고 하는 군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교수님을 믿고 교수님의 강의를 들어야 합니까, 교수님?

(교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심기가 불편한 듯이 교수님이 학생을 째려본다.)

Prof: I guess you'll have to take them on faith, son.

교수님: 그것들은 믿어야 하는 것 같네.

Student : That is it sir.. The link between man & God is FAITH. That is all that keeps things moving & alive

학생: 바로 그것입니다 교수님...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고리는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모든 것이 돌아가고, 살아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죠.

은사 테스트 라는 것이 있습니다. 객관식의 여러 가지 질문을 주고, 그에 대한 답을 달면 답에 따른 점수의 총점으로 자신이 특별하게 받은 은사를 알아내는 테스트 입니다. 심리테스트와 비슷하게 보이기도 하기에,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참고자료나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등의 친목, 친교 활동에 주로 사용하고는 합니다. 저도 새내기 시절 이 테스트를 해보았는데요, 95점 인가 97점 인가로 목사의 은사가 나왔습니다.

결과만을 따지고 보면 꽤나 정확한 테스트로 보입니다. 그 당시의 전 서원기도를 철회하고자 부던하게 노력했던 교만한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점수가 나왔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절 돌아보아도 전 목회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외의 재주는 없습니다. 신앙이 먼저인지, 은사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모든 능력은 하나님을 위해서 쓰이지 않고는 쓸모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은사 테스트를 통해서 드러나는 객관적 표상만이 절 목회자로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에게만 주어진 각별한 은사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뛰어난 영적 감응력을 들 있습니다. 믿기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전 영적인 체험을 꽤 많이 한 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안수기도를 받으면서 열린 영적 각성을 통해 수많은 이적들을 경험해 왔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단지 경험을 통해서 쌓여가는 능력이 아니라, 받은 은사가 경험을 만들어 내곤 합니다. 이를테면, 길을 걷다가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든다 싶으면 여지없이 점집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지인들에게 농담처럼 '내가 찍어주는 점집에 가면 진짜 제대로 된 귀신들린 점쟁이를 만날 수 있다' 라고 이야기 하고는 합니다. 그들에게 점을 보러 가라고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농담 속에 뼈를 담아 둔 것입니다. 저 점집에 귀신이 있다는 것을 제가 안다는 건, 그 귀신을 이길 수 있다는 소리죠. 이길 수 없다면 볼 수도 없을 겁니다. 귀신은 영적 존재이고 전 육적 존재니까요. 그럼에도, 육적인 존재인 제가 그 영적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 육과 영의 능력이 모두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말의 뼈를 찾아내는 사람은 지금껏 없었습니다.

외에도 교회내의 영적 흐름을 읽어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한국 교회 전체의 영적인 흐름을 읽어내기도 합니다. 이는 앞서도 말씀 드렸듯, 연습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복음의 진수를 깨닫는, 정말로 불의 세례를 받은 그 날 하나님의 존재가 제 모든 세포 하나에 까지 각인되어 있다는 것, 유전자 하나에까지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원래 하나님 이셨음을 내 존재는 태고에서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과 같이 완전하게 제 능력 외의 능력이 불어넣어준 것 입니다. 이는 제 신앙의 자랑이요, 자랑입니다. 교만스럽게 하는 자랑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당당하게 밝혀 이야기 해 줄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능력이 있다면 뭔가 사람이 대단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에 저희 교회의 담임 목사님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지난 포스트에서도 종종 언급하였듯, 담임 목사님은 제 영적 아버지가 되십니다. 제 친아버지께서 제 몸을 낳아주셨다면, 목사님은 제 영을 깨워 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 지금도 목사님의 말씀이라면,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을 때 그랬던 것처럼 밥을 먹다가도 튀어나갑니다. 경외. 딱 이 단어로 설명될 수 있는 분이 바로 담임 목사님 이십니다(그렇다고 하나님보다 앞서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보다 더 경외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목사님께서는 특별한 영적인 능력이 없으십니다. 목사님께서도 종종 고백하시듯, 당신에게는 눈에 보이는 능력은 없습니다. 목사님께서 가진 능력이라면 오래 참음과 사랑, 포용력과 기도 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더 뛰어난 인간일까요?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전 감히 목사님과 견줄 수 없습니다. 여자가 낳은 인물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신발 끈 조차도 묶지 한다 라고 했다면, 목사님은 그런 세례 요한보다 못 하신 존재가 되시고(성경 말씀에 따라), 전 그 한참 밑, 목사님의 신발 끈 조차도 묶지 못 할 존잽니다. 한참이나, 정말로 예수님께서 보시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한심한 인간이 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 왜 제게 이런 능력이 있는 것일까요? 저 따위보다는 목사님께, 세례 요한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면 더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제가 너무나 못나고 모자란 인간이라, 이런 능력으로 절 묶어두지 않으신다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에 제게 능력을 주신 것 입니다. 이러한 이적에 가까운 능력이 없이도, 특별하게 신경 쓰지 않아도 하나님을 따르는 평생을 보낼 인간이었다면 제게 이런 능력을 주지 않으셨을 겁니다. 이런 능력, 이적의 능력의 절정을 보여주는 인물로 성경에서는 모세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정말로 수많은 이적을 행했고, 최고, 최대의 능력이랄 수 있는 홍해사건의 주인공 입니다. 몇 번이나 영화로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니까요. 물론 그가 시대의 지도자, 이스라엘의 뛰어난 지도자임은 분명합니다. 반면에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 하는 대표적인 인간으로도 기억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입이 어눌하다 하여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모세의 한심함과 불신에 실망하셔서 죽이려 하셨을 때는 부인 덕분에 살아났고, 홍해를 가를 때도 자신의 의가 과도하게 노출되었고,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만들 때도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일을 처리합니다. 그 때문에 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 하는 처벌을 받게 되죠.

만약 모세에게 이적으로 통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는 절대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기억되지 않았을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그와 함께 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정말로 패역한 삶을 살았을 것 입니다. 반면에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한 사람을 보면,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골리앗을 죽였을 때도, 사울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을 때도, 성전을 건축하려 준비할 때도 그의 능력으로 해 냈습니다. 완전히 바닥부터 자신의 힘으로 기어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하나님께서 크게 기억하신 이유는, 그가 기도할 줄 아는,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성전을 건축할 수 없게 되었고, 우리야의 아내를 취하는 범죄를 행하긴 했지만, 되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범죄 까지도 역전하시어 그 계보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가문을 이루셨을 정도로 그의 회개는 철저한 것 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도 됐습니다. 그는 기도할 줄 알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줄 알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목숨을 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들을 볼 때 저는 모세와 같은 인간이랄 수 있습니다. 아니, 모세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인물입니다. 모세는 그래도 40년을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전 그런 훈련조차도 없으니까요. 고린도전서 12:2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인데, 순서대로 순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도와 선지자는 오늘로 치면 목회자와 선교사를 지칭하는 것이고, 교사는 그대로 교사, 주일학교 교사 할 때의 그 교사 입니다. 그리고 다음이 '능력'을 행하는 자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신유, 돕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리더쉽), 방언 이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흔히 놀랍다고 느끼는 능력들은 모두 하위권에 있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언 보다는 돕고 다스리는 것을, 병 고치고 능력을 행하는 것 보다는 교사를 더 높게 보신다는 입니다. 그리고 더 자세히 보면, 방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이지만 돕고 다스리는 것은 자신의 힘을 소모하지 않고는 불가능 한 일 입니다. 고치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교사는 스스로 공부하고 헌신하지 않고서는 할 없는 일 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도 능력이 있는 자를 높이 보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더 존귀하게 보신다는 말씀 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필요 없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최선이다라는 것을 의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보다도 더 귀하게 생각하고 기대해야 하는 것은 자신을 '드리는' 것에 있어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치유, 돕고 다스리는 것, 방언 의 순서를 보면 범주가 민족과 온 세계 열방에서 개인에게로 좁혀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온 민족과 세계 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고, 선지자는 광야에서 민족과 족속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부르짖는 자들이고, 교사는 교회의 영적 지식을 담당하고, 돕고 다스리는 것(현대로 치면 집사, 장로 등의 직분자)은 교회 안에서 작은 일들을 담당하고, 방언은 순전히 개인의 영적 부흥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고, 좋아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손을 빌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림으로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의 근본 부르심을 받은 이유랄 있는 것이죠.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서 볼 때, 제 능력은 너무나 부끄러운 것 입니다. 점쟁이를 찾아내고, 귀신을 보고, 귀신과 대화 한다고 해서 그 어느 누구도 전도할 수 없습니다. 제 능력을 보여줘도 아무도 농담의 뼈를 찾아내지 못 했다고 한 말의 진의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영적인 능력이 있어도, 결국 한 영혼도 구원할 없는 한심한 능력입니다. 이는 절대로 부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저에게 있어서 이러한 능력의 증거가 없이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 한다는 것은 정말로 부끄러운 일 입니다. 그리고 현대의 사도, 현대의 선지자가 되겠다는 자에게 있어서 이 능력이 영혼 구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 한다는 것은, 평신도 이면서도 수십, 수백명의 영혼을 전도하는 분들에게 제 낯을 들 없게 만드는 일 입니다. 오히려 저보다도 그분들이 더 사도와 선지자에 가까우시니까요.

교회에서 종종 방언의 능력을 자랑 아닌 자랑으로 여기는 분들을 봅니다. 신유의 은사가 있는 분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하는 분들을 목도하곤 합니다. 예언의 은사가 있다는 분들을 우러러 보는 사람들도 많이 봅니다. 하지만 제가 위로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듯, 부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병을 고치는 사람보다 교사로서 영적인 병을 고치는 사람이 더 훌륭한 일군입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보다 묵묵히 집사로, 장로로 교회의 작고 궂은 일들을 손에 때 묻혀가며, 땀 흘려가며 헌신하는 분들이 뛰어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영적인 능력을 갈구하지 마십시오. 이는 굉장히 위험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고백과도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이해 못 하셔서 분노를 발하시는 일은 없을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십니다. 육적인 존재로서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갑갑함을. 그래서 직접 육화하시어 오셨으니까요. 단지, 그런 갑갑함을 아는 것은 하나님 뿐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사단도, 귀신들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갑갑함을 이기지 못 해 영적인 능력을 갈구하기 시작할 때, 사단의 공격도 시작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에서는 늘 사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할 때, 바로 그 때가 갑갑함의 최고조임을 이 악랄한 존재는 알고 있으니까요.

영적인 능력을 구할 바엔 직분을 구하시길 권합니다. 집사가 되길, 장로가 되길, 교사가 되길 기도하시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빌리는 것은 결국 내 능력이 아닙니다. 천국에 쌓일 상급도 그만큼 줄게 되겠죠. 스스로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서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것이 정말로 귀하고 값진 것이지, 무작정 하나님의 능력만을 간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드리고, 모든 헌신을 온전히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뛰어난 각종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능력 모두는 결국 원래가 하나님의 것 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이유가 없죠. 부디 하나님께서도 놀라실 만큼,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정말 드리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불러 주셨듯, 여러분의 헌신과 하나님 사랑의 열정이 목숨을 드리기까지 성장하시길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샬롬.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랑에 빠졌었고...

이번엔 다른 사랑일 것 같습니다.

예상이 맞았으면 좋겠네요.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잠 19:14)

느헤미야 아저씨가 천국에서 절 보면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겁니다.

 

"닥치고 회개!"

 

그래서 닥치고 회개합니다...